빅배스·자산 매각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는 모습
경쟁국 기업들은 AI 등 미래 투자 적극 늘리는데
국내 기업들은 재원·의지·응원 기대 어려워
장기적 기업경쟁력 우하향 불가피…"암울한 미래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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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 이른바 '밸류업'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는 시점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밸류업 프로그램이 현 시점에선 되레 디스카운트를 심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기업들은 주주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단기적 이벤트 천착에 기업경쟁력을 깎아내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24년 2월 윤석열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을 발표한 이후 코스피와 코스닥지수는 상승세를 보이다가 1년이 지난 지금 원점으로 돌아왔다. 국내외 여러 변수들이 있었지만 밸류업이 실질적으로 기업의 주가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경쟁력 개선을 유도했는지는 미지수다.
정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주주환원이라는 거대한 담론 아래 눈치봐야 할 주주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장기적 투자는 고사하고 주가 반등을 위해 단기적 이벤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물결 위에 올라탄 한화그룹을 제외하면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그룹이나 금융사는 전무한 상황"이라며 "주가를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는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매각하는 소극적 방법밖에 없다"고 전했다.
투자금융업계 관계자는 "적자를 내더라도 빅배스나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면 주가가 올라가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며 "CEO들의 성과도 단기적으로 평가받는 추세가 되다보니 기업들의 밸류업 프로그램 역시 중장기적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당장 주가를 반등시킬 수 있는 재무적 이벤트에 집중하는 게 트렌드가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비단 우리 기업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기업들이 이미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요점은 그 기업만의 철학과 문화가 배제된 무조건의 주주환원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T)가 이 문제를 짚으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언급했다. 1990년까지만 해도 '기술 발전'이라는 이상을 좇았던 보잉은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와 합병 이후 단기적 재무 성과에 치중하고 엔지니어링 및 혁신 중심 문화를 잃었다. GE 역시 과도한 재무 중심 경영이 부각되면서 실패 사례도 꼽힌다. 코닥은 월스트리트의 압박에 의해 아날로그 필름 사업을 지속하다가 201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화이자는 2000년대 공격적인 M&A와 주주환원을 우선시하며 주가를 부양했다. 하지만 2020년 이 같은 전략이 과도했음을 인식하고 장기투자를 위해 자사주 매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화이자는 코로나 기간 동안 백신을 성공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는 당뇨병 치료 선두기업이지만, 비만 치료제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즉 기업의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재무적 목표와 기술 혁신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FT의 논지다. 특히 미국 기업의 경우 소유 분산으로 주주의 수가 너무 많아 단기 수익에 치중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처럼 창업자 중심의 기업이 장기적으로 투자와 개발에 집중,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 대기업의 경우 상당수가 재벌 소속인만큼 장기적 투자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아니, 있었다. 창업자와 2세 시대를 지나 재벌 3~4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수 재벌 기업의 철학과 문화는 희석됐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행동주의로부터 뭇매를 맞고 사모펀드(PEF)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다는 명목 하에 밸류업 과제가 더해졌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단기 수익 치중의 늪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기업과 시장은 장기적으로 투자를 하기 꺼려진다"라는 새로운 디스카운트 요인이 됐다.
글로벌 사모펀드 관계자는 "안티 차이나로 다수의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투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며 "하지만 한국 산업계 전반의 매력도가 떨어지고 있고 오너 경영인들의 의지는 예전만 못한데 거기에 한국 내 반기업, 반금융 정서에 탄핵 정국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성까지 더해지면서 밸류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관심 자체가 식어가고 있다"고 평했다.
다른 관계자는 "한 때 사들이기만 하던 그룹들이 이제는 정반대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데 이게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인수한지 채 몇 년도 안된 회사들을 내놓는걸 보면 우리나라 그룹들이 어떤 장기적 안목을 갖고 기업들을 그렇게 사들였었는지 투자자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레버리지 시대가 끝난 이후 국내 다수 기업은 멈췄거나 후진 중이다. 그러는 사이 미국 빅테크와 월스트리트는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골드러시를 마주하고 있다. 기업들은 관련 투자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고, 기업과 투자은행들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시장 파이를 키우고 있다. 거기에 중국의 딥시크는 또다른 충격파를 던졌다. 미국, 중국과 비교하자면 한국의 기업과 자본시장은 대대적인 AI 투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물론 국내 기업들의 배당이 적거나 자사주를 쓸데없이 많이 들고 있거나 고질적인 거버넌스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 장기투자처로서 매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디스카운트 요소라고 얘기한다. 단기수익에만 천착하게 하는 K-밸류업은 한국 기업경쟁력의 우하향 기조를 뒤집는 데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주가는 저평가 해소가 아닌, 성장성을 따르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