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쇄신 기대감…"더 떨어질 곳 없다" 평도
높은 불확실성에 신용위험 상승…재무 대응 분주
문제는 "올해도 어렵다"…'털어낸' 효과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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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연초부터 기업들의 '빅배스(Big bath; 대규모 손실 인식)'가 줄을 이었다. 통상 4분기는 리더십 교체, 회계연도 결산 등으로 빅배스가 활발한데, 이번 연말연초엔 유독 이 같은 움직임이 더욱 활발하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해 4분기 대기업들의 조 단위 손실이 눈에 띄었는데, 오히려 주가가 오르며 시장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국내외 불확실성 속 기업들이 주가를 끌어올릴 만한 뚜렷한 '재료'를 내놓지 못하면서 차라리 쇄신의 기대감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달 조 단위 영업 적자를 발표한 현대건설이다. 대규모 적자는 자회사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사업에서 나온 대규모 손실을 회계상 미리 반영한 결과다. 나란히 첫 임기를 맡게 된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 주우정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빅배스라는 분석이다.
23년 만의 최악의 실적을 발표했지만, 증시는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월 21일 2만6100원에 마감한 현대건설 주가는 22일 실적 발표 이후 주가는 9% 급등했다. 이후 23일과 24일에도 상승세를 이어가 24일 종가 3만1500원을 기록했다. 3일 만에 주가가 20%가 오른 셈이다.
이달 지난 4분기 실적을 발표한 이마트도 마찬가지다. 이마트는 지난해 4분기 영업 적자 771억원을 기록했는데, 통상임금 등 일회성 인건비를 감안한 영업이익은 흑자로 돌아섰다는 설명이다. 같은 날 이마트는 배당 증가와 자사주 소각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계획도 발표했다. 이후 무거웠던 이마트 주가가 상승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장인화 회장 취임 2년 만인 포스코그룹도 1조원 규모의 빅배스를 단행했다. 4분기 결산 실적에서 일회성 손실 내역을 강조했는데, 장 회장 취임 초기에 부실을 털고 가려는 행보로 해석된다. 한온시스템도 지난해 4분기 30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일시에 반영했다. 올해 1분기 예상 손실 일부도 선반영했다. 한국앤컴퍼니 인수 이후 시작된 구조조정의 여파다. 금호건설도 지난해 저수익 사업 계약 해지, 회수 가능성이 낮아진 대여금 손실 처리를 단행해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기업들이 쏟아내는 어두운 실적에 주가가 반응하는 경향이 우려만큼 나오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여러 불확실성 속 기업들이 뚜렷한 미래 비전과 대규모 투자 등을 공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차라리 과거의 부실을 털고 나가겠다는 메시지가 '그나마' 시장에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주가가 '이미 바닥이라' 더 떨어질 곳도 없다는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실적에서 대규모 적자가 나올 기업들이 미리 시장에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둔 터라 시장 충격이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 증시가 전반적으로 침체해 있다 보니 차라리 빅배스 같은 액션에 나서는 기업에 시장이 반응한 것 같고, 기업 입장에서는 다 같이 털고 갈 때 같이 나서는 것이 덜 눈에 띄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정국 불안 등 불확실성이 클 것으로 보는 곳들이 금융권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오히려 지난해 4분기를 부실을 처리할 '적기'로 만들었다는 평가다. 지난해부터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간 기업들도 많기 때문에, 올해부터 그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려면 손실을 미리 선반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이 계속되다 보니 신용도 이슈도 점점 수면위로 오르고 있다. 미리 올해 신용등급평가를 대비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통상 6월 전후가 신용평가사의 정기 평가 발표이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성적이 등급 평가에 적용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뿐 아니라 향후 실적 및 재무 전망이 종합적으로 고려되는 점을 감안하면, 지난해에 회계상 부실을 털고 가는 것이 올해 평가에는 긍정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풍부한 유동성을 기반으로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투자했던 자산들에 대한 평가손실이 대거 발생하고 있는 점도 고려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인수 후 장기간 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기업들의 기업가치 하락이 반영되면서 손상차손이 발생하는데, 투자자산은 영업외손익으로 잡히면서 상대적으로 빅배스에 나서기 부담이 적은 면도 있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은 작년 4분기 영업손실은 2346억원, 순손실은 1조1207억원을 보였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옛 일진머티리얼즈)를 2022년 2조7000억원에 인수했지만, 인수 후 주가가 반토막 난 영향이 크다. 한화솔루션도 순손실 1315억원을 기록했는데, 2021년 미국 태양광 사업 강화를 위해 인수한 REC실리콘 손상차손 600억원에 불용자산 손상차손까지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빅배스를 단행하고 올해 이후 실적 개선세를 보이겠다는 회사들이 종종 있었다"며 "조달 비용 증가 등으로 올해 실적 개선세가 없으면 신용 리스크가 오를 기업들이 많아 증자 등 미리 재무적 대비에 나서는 분위기"고 말했다.
문제는 올해도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이다. 내수 경기 침체에 탄핵 정국에 따른 정책 불확실성까지 높아졌다. 미국 신정부 리스크 증대 및 글로벌 통상환경 급변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에서도 "하반기에 올해 사업계획을 어차피 새로 짜야한다"고 보는 상황이라 기업들도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
한 회계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았고, 대부분의 기업이 여유롭지 못하다 보니 '털어내고 잘해보자'는 빅배스 니즈(수요)가 있었다"며 "다만 감사인들이 올해도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래 추정치를 보수적으로 잡은 점을 고려하면, 올해 과연 부담을 덜어 낸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