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재편 앞두고 고심 깊어진 한화·롯데·SK
대관 수장 교체하고 실무진 인력 늘리는 우리금융
지주는 노출 최소화 중점…보험사는 광폭 행보
-
재계와 금융권이 올해 이뤄질 사업재편과 규제 리스크에 대비해 대관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큰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인력 보강과 조직 재편이 한창이다. 특히 올해는 국내외 정치 상황에 대한 변동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계열사 조직 강화한 SK·한화…대관 라인 승진한 롯데
SK그룹이 가장 먼저 대관 조직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있던 글로벌 대관 총괄조직 'GPA(Global Public Affairs)'를 작년 말 해체하고 인력을 계열사로 재배치했다. GPA 수장이었던 김정일 부사장(전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SK하이닉스 산하 코퍼레이트센터(Corporate Center)로 자리를 옮겼다.
한 대기업 대관 담당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통상 압박에 대한 우려가 커진만큼 현장에서 직접 대응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아래 조직을 재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화그룹은 대관 조직을 3세 경영인 중심으로 개편하고 있다. 우선 올 3월 그룹 커뮤니케이션위원회 위원장(사장)에 이명건 전 동아일보 국장이 취임을 앞두고 있다. 이태길 현 사장의 후임이다. 김동관 부회장이 작년 국정감사에서 두 차례나 증인으로 채택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대관 총괄 헤드가 필요하다는 데 내부적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3형제의 사업 영역별로 대관 라인이 다원화하고 있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 중심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관조직이 가장 먼저 체계를 잡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부터 20여명의 전직 고위 공무원을 영입했고, 국가정보원과 국무조정실 출신 등 10명을 확보했다. 한화오션도 7명의 고위 관료 출신을 영입하며 조직을 보강했다.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이 이끄는 금융 부문 CR(대외협력) 조직도 구축 중이다. 막내 김동선 부사장이 맡게 될 유통(한화호텔앤리조트)과 제조(한화세미텍·한화로보틱스 등) 부문의 대관 조직도 별도로 꾸려질 전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3세 경영 체제로의 전환을 앞둔 그룹들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리스크 관리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은 유통 부문에서 이뤄질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대관 라인을 정비했다. 박왕근 전무가 대관 총괄 임원으로, 임성복 커뮤니케이션 실장(전무)이 부사장으로 각각 승진했다.
이는 지방 점포 정리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데 따른 조치다. 롯데백화점 마산점의 경우 10년치 임대료를 선지급하고서야 겨우 철수가 가능했던 만큼, 향후 진행될 구조조정 과정에서 지자체와의 협상력이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관 라인 수장들의 승진은 이 같은 현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부 지원 받아야하는 석화 대관들…경력직 선호 현상 '뚜렷'
석유화학 계열사를 보유한 SK그룹(SK이노베이션), LG그룹(LG화학), 포스코(포스코케미칼), 롯데그룹(롯데케미칼) 등은 대관 업무가 더욱 바빠졌다. 작년부터 이어진 업황 부진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개별 기업 차원의 구조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다. 석유화학은 국가 기간산업인 만큼 정부 차원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그룹의 현안이 많아지면서 대관 업무도 세분화·전문화되는 추세"라며 "특히 석유화학 업황 부진으로 사업재편이 예상되는 만큼 정부 지원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보니 대관 인력 운용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그룹처럼 공채 출신을 키워 쓰던 방식에서, SK그룹처럼 경력직을 영입해 즉시 투입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다른 대관 담당자는 "현안 대응이 시급하다 보니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경력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전했다.
금융권은 정중동 움직임…"최대한 몸 사리자"
금융권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우리금융지주다. 장광익 부사장에서 이정섭 브랜드전략부 상무로 대관 담당이 교체됐다. 실무진도 기존 3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우리금융은 지난해 5대 금융지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국정감사에서 임종룡 회장이 출석한 바 있는데, 당시 타 금융지주 대비 대응 인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금융지주 임원은 "정치권 상황이 불투명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기가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며 "하반기 정국 변화에 대비해 내부적으로 준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KB금융지주는 대관을 담당하는 기획조정부 실무진을 박찬용 부장에서 박명화 부장으로 교체했다. 박 부장은 KB데이타시스템 대표로 이동했다. 신한금융과 하나금융은 각각 김광재 그룹장, 오정택 부사장이 작년과 같이 업무를 이어간다. 지난해를 무리 없이 넘겼고, 정국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대부분의 금융지주 대관들은 최대한 '로우 프로파일(low profile)' 전략을 고수하는 모습이다. 적극적으로 국회 등 관계부처 대응에 나서기 보다는, 대외 노출을 최소화하며 내부적으로 동향 파악에 나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 금융지주 대관 담당자는 "국회 출근도 월 1~2회 정도로 최소화하고 있다"며 "의원실에서 호출할 때만 가고 있다. 괜히 눈에 띄어 새로운 민원이나 이슈가 생기는 걸 경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다른 금융지주 관계자는 "당분간은 지난해 금융당국과 협의한 상생금융 확대에만 집중하면서 최대한 몸을 낮출 계획"이라며 "크게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보다 관망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금융지주 산하 보험사 대관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작년 킥스(K-ICS) 비율이 KB손해보험은 27.8%포인트, KB라이프생명은 64.5%포인트, 신한라이프는 44%포인트씩 전년 대비 하락했다. 보험사들은 자본건전성 관리를 위해 금융당국과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험사들의 금융당국 출신 영입도 이어지고 있다. 한화생명은 이달 초 금융위원회 출신 윤동욱 전 서기관을 경영전략실 담당 임원(상무)으로 선임했다. 앞서 금융위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거친 이한샘 상무도 영입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이른바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한 것도 보험업계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통과될 경우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일부를 매각해야 한다.
올해 들어 삼성생명은 킥스비율이 처음으로 200% 미만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 주가 변동성이 커지면서다. 삼성생명 대관들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 지분에 대한 시가평가 제외 등을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정치권 상황이 불투명한 만큼 개정 가능성을 예단하기는 어렵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정권 교체기마다 대관이 중요했지만, 이번에는 각 그룹의 생존과 직결된 과제들이 겹쳐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모습"이라며 "올 하반기 정치 지형 변화에 대비해 물밑작업이 한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