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WA 관리 특명 은행들 정국혼란 속 벌써부터 정책펀드 걱정
입력 2025.02.11 07:00
    李 '녹생성장'부터 文 '뉴딜펀드'까지
    정권따라 정책펀드 우후죽순 생겨도
    이름만 달리 '엇비슷'…지속성도 '의문'
    위험가중치 400%에 RWA 관리 어려워
    "정책펀드 자금 민간에 풀려야"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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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국혼란이 이어지면서 금융권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다. 시중은행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새롭게 등장할 정책펀드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탄핵정국이 마무리되면 정치권의 경제 살리기 드라이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가뜩이나 고환율과 시장 변동성 확대로 위험가중자산(RWA) 관리가 힘들어졌는데, 신규 정책펀드에 동원되면 출자 여력이 더 줄어들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올해 RWA 관리 기조를 강화했다. 하나은행은 하루 단위로 RWA 변동을 체크하고, 주 2회 그룹 임원 주관 회의를 열고 RWA 관리 계획 이행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통상 본점 차원에서 이뤄지는 RWA 관리를 영업점까지 확대했다.

      신한은행은 기업대출 관리 기준을 강화하고, 신규 대출을 집행할 때도 신용등급과 담보비율이 높은 우량 기업을 중심으로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은행 역시 외화표시 자산은 줄이고 원화담보대출 등을 늘리는 방식으로 위험가중자산 '리밸런싱'에 나섰다. 

      시중은행들이 연초부터 RWA 관리 강화에 나선 까닭은 RWA 증가가 보통주자기자본(CET1) 비율에 영향을 줘 밸류업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CET1 비율은 금융사의 재무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 비율에 따라 주주 배당 여력이 결정된다. 금융당국은 금융지주에 CET1 비율을 13% 이상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통상 은행들은 RWA를 관리할 때 대출 기준 강화와 더불어 펀드 출자액을 가장 먼저 줄인다. 펀드 출자액은 위험가중치가 400%로 반영되는 탓이다. 가령 은행이 A 사모펀드 운용사(PEF)의 펀드에 100억원을 신규 출자한다면, RWA는 400억원 늘어나는 식이다. RWA는 투자자산의 위험 정도에 따라 가중치가 부여된다.

      문제는 은행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출자가 불가피한 정책펀드다. 정부가 주도해 결성하는 정책펀드는 통상 정책자금이 50%, 은행 등 금융사들의 자금이 50% 투입된다. 당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은행들은, 이러한 정부 주도 정책펀드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출자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정책펀드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산업·에너지·기술 분야 등 공익적 목적을 등에 업고 조성되는만큼, 이름만 달리할 뿐 차별성도 적다. 이 때문에 투자처가 전임 정부 시절 정책펀드와 유사하거나 모호하고, 지속성도 약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색성장펀드', 박근혜 정부의 '통일펀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소부장펀드'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정권마다 새로운 테마의 정책펀드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뉴딜펀드는 지난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신성장펀드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사업구조가 바뀌고 정책 자금의 비중과 규모도 줄면서, 당시 투자자들은 큰 혼선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대표적인 정책펀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를 과시하듯 당국이 정책펀드를 조성하지만,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뉴딜펀드만 봐도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게 현실이고, 혁신성장펀드로 이름이 바뀐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중견기업전용펀드와 미래에너지펀드, 기후기술펀드 등 은행권을 동원한 정책펀드만 3개가 조성됐다. 세 정책펀드의 조성 규모만도 17조원에 달한다. 물론 은행권이 전부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고 출자 역시 수년에 걸쳐 분산 집행되기는 하지만, RWA 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은행 입장에선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지난해 은행권은 당국에 정책펀드 출자에 대한 위험가중치 반영 비율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후기술펀드와 미래에너지펀드 등 일부에만 RWA 100%가 적용됐다. 이 때문에 한 시중은행은 중견기업전용펀드 500억원 출자를 예정된 3분기가 아닌 연말에서야 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RWA 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정책펀드가 늘어나면, 민간 출자시장 위축도 불가피하다. 민간 GP에 흘러들어갈 자금이 줄어드는 탓이다. 현재 새마을금고와 연기금·공제회 등이 지갑을 닫은 가운데, 은행권까지 RWA 관리 탓에 출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중·소형 하우스들은 펀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정국 혼란이 장기화하고 '조기대선' 가능성까지 고개를 들면서, 은행권에서는 벌써부터 정권 교체 이후 새로운 정책펀드 등장을 걱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례적으로 시중은행장들과 간담회를 가지는 등 벌써부터 정치권이 '은행 군기잡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중견기업전용펀드도 10년을 목표로 지난해 은행들의 첫 출자가 이뤄졌지만, 아무도 10년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정권이 바뀌면 또 어떤 새로운 정책펀드를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걱정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