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무죄 선고받자 기업 삼성전자의 족쇄가 풀렸다는 분위기
삼성전자는 초국가적 인프라…애당초 개인 사정과 분리됐어야
정쟁 휘말리며 잘못에 비해 과도한 리스크 진 건 '개인'의 비극
'기업' 삼성전자가 같이 피해 봤어야 할 합리적 이유 찾기 곤란
지난 10년 만회하자면 이사회 직접 참여하는 등 변화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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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합병·회계부정 협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기소한 19개 혐의 전부가 무죄가 됐으니 긴 시간 이 회장을 짓누른 사법 리스크도 끝물에 다다른 듯하다.
흥미로운 건 오너 개인의 무죄 판결을 마치 삼성전자의 족쇄가 풀린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일론 머스크나 젠슨 황 같은 기업가들을 보다 보면 사람과 기업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들은 테슬라나 엔비디아가 현재 위치까지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두루 인정받는다. 실제로 이들의 이름값이나 얼굴을 믿고 주식을 사 모으는 주주들도 적지 않다. 기업가 역량과 기업체 성장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지닌다는 건 굳이 통계치를 들이밀지 않아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이재용 회장 거취와 삼성전자의 운명을 한 묶음으로 설명하는 것도 일견 그럴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틀린 접근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이 회장 개인에도 좋을 것이 없고, 삼성전자에도 국가 경제에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선대 창업주나 삼성전자라는 위대한 기업을 일군 수많은 인재 모두에게 굉장한 실례(失禮)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삼성전자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고 해보자. "창업자의 손자가 재판을 받느라 초격차를 일군 글로벌 1위 반도체 기업이 10여년 만에 큰 위기에 처했다"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 참 안됐다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투자가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창업주도 아니고 3세인 손자가 회사 경영에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사실인가"
이재용 회장에게도 분명 물려받은 기업가의 피가 흐를 것이다. 보고 자란 환경도 달랐을 테고 특히 가업, 삼성전자에 대한 책임감은 남과 비교 불가한 수준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삼성그룹이 왕조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혈통이나 족보 따져가며 돈을 맡기는 투자자는 없다. 하물며 3류, 4류 소리를 듣는 한국 정치권에서도 순혈주의를 내세워 표를 구하면 욕을 먹게 마련이다. 이재용 회장은 선대가 구축한 초격차 해자 속에서 키를 물려받은 입장이다. 재판 때문에 경영 능력을 키우고 입증할 기회를 놓쳤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재판받느라 회사가 위험에 처했다는 식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왜 재판에 앞서 본인 공백을 메워줄 적임자나 대리인을 마련해두지 않았는가"
반도체는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서 있는 산업이다. 최근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가 R1을 내놓자 산업 전체의 판도가 하루아침에 뒤집히니 마니 하는데, 게임의 법칙이 어떻게 흘러가건 모든 종류의 기술전쟁은 기본적으로 성능 좋은 반도체를 실탄 삼아 벌어진다. 그 반도체 산업의 정점에 삼성전자가 서 있었다. 국가 경제는 물론 글로벌 외교·안보 무대에서도 삼성전자는 최첨단 인프라로 기능해왔다.
그런 회사의 경영에 오너 개인의 안위나 거취 문제가 끼어들 수 있다면 대참사가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지금 삼성전자가 휘청이니 진짜로 국가의 명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창업주건 창업 2~3세건 지각 있는 기업가였다면 일찌감치 오너 일가의 사정과 회사의 운명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해놨어야 한다. 오너가 억울하게 재판받느라 삼성전자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는 건 이 회장에게 결코 유리한 변호일 수 없다.
"능력 있는 기업가였다면 본인이 없다고 회사가 제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성장 기회를 놓치는 상황을 보고만 있었을까"
일론 머스크가 수시로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일삼고 기행을 벌여 눈살 찌푸리는 이도 적지 않지만 많은 투자자들은 기꺼이 테슬라에 자금을 맡긴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기업을 키우고 성장시키는 일에선 대체불가한 적임자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슬라는 지난 수년 독보적 성과를 거두며 100년 된 자동차 산업의 헤게모니를 뒤바꿔버렸다. 주주들의 자산은 해를 거듭하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 투자자들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면 법을 지키는 선에서 무슨 짓이라도 해줄 사람을 기업가로, 경영자로 떠받든다.
지난 10여년 이 회장이 겪은 사법 리스크는 분명 비극이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재판 때문에, 검찰의 무리한 기소 때문에, 기업을 볼모 삼아 권력을 다투는 후진적 정치풍토 때문에, 정의롭지도 않고 시류에도 맞지 않는 징벌적 상속세 때문에 이 회장 개인을 비롯한 일가가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오너 개인의 비극에 기업 삼성전자가 빨려 들어가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돼야만 하는가라고 되물으면 궁색해진다. 어떤 억울한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건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게끔 조치를 취하는 걸 최우선으로 뒀어야 책임 경영이다. 삼성전자는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떠나 상장사다. 경영권을 승계한 창업 3세가 자리를 비운다고 회사가 100% 실력 발휘를 못한다면 주식을 보유할 매력이 떨어질 뿐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사회 중심 경영을 내걸고 회사를 굴려온 경영진들은 무엇을 했나"
결국 이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분명히 유가증권시장에 공개 상장된 주식회사다. 주주들은 매년 꼬박 주총장을 찾아 이사를 선임하고 경영판단을 맡겨왔다. 단순히 법이 그렇게 강제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주총과 이사회를 통한 의사결정 방식이 장기 지속가능한 경영 성과를 보장해왔기 때문에 삼성전자도 이사회 제도를 따르는 것이다. 주총을 거쳐 이사회에 진입한 등기 이사는 법적으로 회장 직함보다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간 삼성전자에선 이재용 회장이 없어서 인수합병(M&A)도 못하고 신사업도 제때 일으키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한때 시장에선 경영진들이 이재용 회장 재판을 지원하려 위기를 연출하려다 진짜 위기에 처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오르내렸다. 작년부터는 엔비디아와 같은 고객사에서 삼성전자의 경영진을 믿고 일하기 힘들다는 잡음이 불거지는가 하면 직원들이 커뮤니티 등지에서 내부 사정을 폭로하고 경영진을 성토하는 일도 이어졌다. 이 회장은 물론 삼성전자 임직원과 주주 모두에게 달가울 수 없는 평판 리스크들이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단순히 억울한 혐의에 불과했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주주들이 본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무죄 판결 역시 '승계만을 위해 주주에게 고의로 피해를 끼치려 합병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라는 논리에서 내려졌다. 이 회장은 족쇄를 풀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도 당시 합병에 반대했던 외국계 헤지펀드와의 국제소송에서 손해배상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선 합병으로 주주가 부당하게 피해를 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승계 문제로 시작된 사법 리스크에 과장되고 석연치 않은 지점이 없지 않다. 당시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정국에서 재계 1위 삼성그룹 총수인 이 회장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볼모 잡혔다는 시각도 점점 늘어난다. 절충하자면 잘못에 비해 과도한 수사와 기소, 재판으로 이 회장은 경영에 전념할 중요한 시기를 놓쳐 상당한 손해를 본 셈이다. 이 회장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정쟁에 억울하게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억울하게 이용만 당하고 피해를 본 것은 결국 삼성전자다.
주주와 임직원과 등을 돌리는 고객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정치권력이 아무리 말이 안 통하고 안하무인 격으로 이 회장을 옭아매려 한다 해도 오너의 결단만 있었다면 삼성전자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여년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삼성전자 이사회까지 중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위기를 맞닥뜨렸어야 하는 합리적 이유를 도무지 찾기 어렵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IR 담당자들이 주주에게 공개적으로 오너가 없어서 M&A를 추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나. 오너가 사법 리스크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삼성전자 발목까지 딸려들어간 형국"이라며 "어떻게 보면 그냥 글로벌 경쟁사들과 유사한 수준의 거버넌스만 구축해놨으면 될 일이었다. 과거 재벌이 답습해오던, "오너 재가를 받아야만 일이 진행된다"는 방식에서만 벗어났으면 그만이란 얘기"라고 말했다.
자꾸 이재용 회장 개인의 비극을 삼성전자의 위기와 결부시키려 들면 이런 질문이 산더미처럼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재용 회장을 부각시킬수록 삼성전자의 거버넌스가 글로벌 기업들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해 후진적인가 하는 의혹만 부풀어 오른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무죄 판결 이후 과거와 마찬가지로 굵직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4일엔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와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3자 회동을 가졌다. AI 산업이 글로벌 패권 전쟁으로 격화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모처럼 주가도 기대감이 차오르며 이틀 연속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용 회장이 진정으로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지난 10여년을 만회하자면 직접 이사회에 복귀하거나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작업부터 마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