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a D램·HBM3 당시 벌어진 격차가 만들어낸 막대한 나비효과
나홀로 노하우, 현금다발 쌓으며 수년 후 준비하는 SK하이닉스
성적표는 이미 완패 판정…고통 속 D램 재설계 들어간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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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D램 시장 지위가 계속 벌어지는 모습이다. 단 한 번 공정 경쟁력이 뒤집힌 결과로 삼성전자가 너무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게 됐다는 관전평이 나온다.
D램 3사는 현재 10나노급 6세대 공정인 1c D램 경쟁을 앞두고 있다. 통상 D램 경쟁은 선단 공정 기반 D램 설계를 개발하고, 목표 수율을 끌어올린 뒤 양산에 돌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1a에서 1b, 1c로 세대를 거듭할수록 성능과 전력효율은 끌어올리고 칩 사이즈는 줄이는 게 핵심이다. 이 때문에 D램 시장은 팹(fab)을 더 짓지 않고 공정을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는 식으로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1c 경쟁에서 이미 SK하이닉스가 승기를 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단순히 경쟁사보다 1c D램 설계를 빨리 마쳤을 뿐만 아니라 목표수율을 훌쩍 넘겨 양산 단계에 가장 근접한 상태라는 얘기다. SK하이닉스가 1c 공정으로 찍어낸 D램은 직전 세대보다 성능은 28%, 전력효율은 9% 이상 개선됐다. 현시점 수율이 70~80%를 넘어간다면 양산 시점에 경쟁사보다 싸게 더 많은 물량을 공급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고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1a 공정 경쟁이 본격화한 지난 2021년부터 엔비디아와 HBM3 공급 협력을 염두에 두고 개발을 이어간 것이 막대한 나비효과를 낳고 있단 분석이 많다.
HBM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미세하게 찍어낸 최고성능 D램을 더 높이 쌓아야 한다. 칩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게임까지 감안해 설계하자면 과거 메모리 반도체 경쟁 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장 수급 논리보다 고객사 하나하나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니, 더 싸게 더 많은 칩을 찍어내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식으로는 비전이 없다는 데 집중한 것이다.
1a D램의 성공적 설계는 HBM3 시장 독점으로 이어졌고, 이는 HBM3e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때마침 테크 업계의 반도체 구매 방식 역시 더 비싸고 좋은 칩만 쓸어 담는 형태로 변화했다. 고객들이 DDR5 D램과 HBM만 찾는 통에 SK하이닉스의 수익성은 경쟁사의 두배 수준을 훌쩍 넘겨 계속 불어났다. 몇 세대를 거듭해 HBM을 독점 공급하는 통에 관련 노하우 역시 SK하이닉스만 독점적으로 쌓고 있다.
결국 최선단 공정인 1c D램에서도 SK하이닉스가 가장 앞설 수밖에 없는 판이 만들어졌다. 엔비디아가 내년에 받아 갈 HBM4 16단 제품까지는 1b 공정이 적용되니 사실상 2~3년 후 장사까지 시계가 훤하게 뚫려 있다. 그러니 수익성이 박하고 중국에 치여야 하는 DDR4 등 레거시 제품은 덜 팔아도 그만이다. 최전방에서 계속해서 더 많은 마진과 프리미엄을 누리면서 쌓이는 현금으로 2년 후, 3년 후를 대비하는 게임에 돌입하면 된다.
삼성전자가 막대한 기회비용에도 불구하고 D램을 새로 설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은 괴로울지 몰라도 선단공정 설계 단계에서부터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어차피 향후 경쟁을 이어갈 수 없다. HBM을 납품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범용 시장에서도 계속해서 파이를 내줘야 하는 탓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올해 파운드리(비메모리 위탁 생산) 투자를 절반으로 줄일 것이라는 관측이 새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D램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면 한두해 투자를 이어가더라도 그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고객사가 찾지 않는 파운드리에 당장 더 많은 돈을 투입한다 해서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삼성전자는 오는 31일 지난 4분기에 대한 실적 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앞서 잠정실적을 발표한 만큼 작년 SK하이닉스에 완패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밝혀졌다. 투자가들 역시 이미 웬만한 악재는 다 드러났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3분기 실적 발표와 연말 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성전자가 계속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목소리가 상당하다.